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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노트

피로사회/ 한병철 著

by 사람과 직업연구소 2015. 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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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한병철

 

 

 

 

책을 말하다>

 

피로하다는 말은 이미 우리 사회에 스트레스만큼 만연하는 표현이 됐다. 과도한 스트레스가 끝없는 피로를 불러오는 듯하다. 알지만 그냥저냥 넘어가는 시대에 피로사회라는 한 눈에도 확 들어오는 제목의 책을 들고 나온 이는 재독철학자 한병철이었다. 그에 대해서 알 길은 저자 소개 정도일 뿐이지만 그가 주목한 이 내용은 섬뜩한 느낌마저 전하며 내게 다가온다. 어쩌면 나름 신랄하게 나를 채찍질 해 온(저자의 표현대로라면 착취해 온’) 사람으로서 내게 참 나는 잔인했구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보통의 사람으로서 좀 글이 어렵다 싶기도 하지만, 그 날카로운 통찰은 주는 바가 크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움, 그는 그냥 철학자이기에 사회현상에 대해 사회적, 혹은 철학적 통찰과 진단을 내리지만, 대안은 없다. 이런 시대에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함께 알고자 한 것은 철학적 바탕이 없는 평범한 독자의 어리석은 바람이었을까?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카페에서 낮잠을 잤던 시간, 잠시지만 달콤했다)

 

 

마음에 남다>

 

-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한 질병이 있다. 그래서 이를테면 박테리아적이라고 할 수 있는 시대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시대는 적어도 항생제의 발명과 함께 종언을 고했다.(중략)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바이러스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면역학적 기술에 힘입어 이미 그 시대를 졸업했다. 21세기의 시작은 병리학적으로 볼 때 박테리아적이지도 바이러스적이지도 않으며, 오히려 신경증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신경성 질환들, 이를테면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경계성성격장애, 소진증후군 등이 21세기 초의 병리학적 상황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전염성 질병이 아니라 경색성 질병이며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질병이다. 따라서 타자의 부정성을 물리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면역학적 기술로는 결코 다스려지지 않는다.(p.11~12)

 

 

- 사회는 오늘날 면역학적인 조직과 방어의 도식으로는 전혀 파악할 수 없는 구도 속으로 점점 빠져들어 가고 있다. 이 새로운 구도는 이질성과 타자성의 소멸을 두드러진 특징으로 한다(p.13)

 

 

- 21세기의 신경성 질환들 역시 그 나름의 변증법을 따르고 있지만, 그것은 부정성의 변증법이 아니라 긍정성의 변증법이다. 그러한 질환은 긍정성의 과잉에서 비롯된 병리적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p.17)

 

 

- 긍정성의 폭력은 박탈하기보다 포화시키며,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고갈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직접적으로 지각되지 않는다(p.21)

 

 

- 21세기 사회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변모했다. 이 사회의 주민도 더 이상 복종적 주체가 아니라 성과주체라고 불린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경영하는 기업가이다(p.23)

 

 

- 오직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명령이 아니라 성과를 향한 압박이 탈진, 우울증을 초래한다. 그렇게 본다면 소진증후군은 탈진한 자아의 표현이라기보다는 다 타서 꺼져버린 탈진한 영혼의 표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중략) 실제로 인간을 병들게 하는 것은 과도한 책임과 주도권이 아니라 후기 근대적 노동사회의 새로운 계율이 된 성과주의의 명령이다(p.26~27)

 

 

- 우울한 인간은 노동하는 동물로서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물론 타자의 강요 없이 자발적으로, 그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다.(중략) 우울증은 성과주체가 더 이상 할 수 있을 수 없을 때 발발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일과 능력의 피로이다.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p.27~28)

 

 

- 자기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타자의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p.29)

 

 

- 멀티태스킹이라는 시간 및 주의 관리 기법은 문명의 진보를 의미하지 않는다. 멀티태스킹은 후기근대의 노동 및 정보사회를 사는 인간만이 갖추고 있는 능력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퇴화라고 할 수 있다. 멀티태스킹은 수렵자유구역의 동물들 사이에서도 광범위하게 발견되는 습성이다. 야생에서의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기법이 멀티태스킹인 것이다.(p.30)

 

 

- 잠이 육체적 이완의 정점이라면 깊은 심심함은 정신적 이완의 정점이다.(발터 벤야민)

단순한 분주함은 어떤 새로운 것도 낳지 못한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재생하고 가속화할 따름이다(p.32)

 

 

- 겉보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보다 더 많은 활동을 하는 때는 없으며, 홀로 고독에 빠져 있을 때보다 덜 외로운 때도 없다(한나 아렌트의 활동적 삶에서)(p.45)

 

 

- 정신의 부재상태, 천박성은 자극에 저항하지 못하는 것, 자극에 대하여 아니라고 대꾸하지 못하는 것에 그 원인이 있다.(중략)

활동성이 첨예화되어 활동과잉으로 치달으면 이는 도리어 아무 저항 없이 모든 자극과 충동에 순종하는 과잉수동성으로 전도되고 만다는 것이 바로 활동성의 변증법이다(p.48)

 

 

- 오늘의 사회를 특징짓는 전반적인 산만함은 강렬하고 정력적인 분노가 일어날 여지를 없애버렸다. 분노는 어떤 상황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이다. 오늘날은 분노 대신 어떤 심대한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는 짜증과 신경질만이 점점 더 확산되어간다(p.50)

 

 

-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만 있고 하지 않을 힘은 없다면 우리는 치명적인 활동과잉 상태에 빠지고 말 것이다(p.53)

 

 

- 역설적이게도 활동과잉은 극단적으로 수동적인 형태의 행위로서 어떤 자유로운 행동의 여지도 남겨놓지 않는다. 그것은 긍정적 힘의 일방적 절대화가 낳은 결과이다(p.54)

 

 

- 피로는 폭력이다. 그것은 모든 공동체, 공동의 삶, 모든 친밀함을, 심지어 언어 그 자체마저 파괴하기 때문이다(p.67)

 

 

- 우울증은 주도권을 쥐려고 노력하는 주체가 통제할 수 없는 것 앞에서 좌초됨으로써 얻게 되는 병이다(p.94)

 

 

- 탈진과 우울 상태에 빠진 성과주체는 말하자면 자기 자신에 의해 소모되어버리는 셈이다. 그는 자기 자신으로 인해, 자신과의 전쟁으로 인해 지치고 탈진해버린다(p.94~95)

 

 

- 우울증 환자는 자신의 자주성에 지쳐버린사람, 즉 자기 자신의 주체가 될 힘을 상실한 사람이다(p.97)

 

 

- 자본주의가 일정한 생산수준에 이르면, 자기착취는 타자에 의한 착취보다 훨씬 효과적이고 능률적으로 된다. 그것은 자기착취가 자유의 감정을 동반하기 때문이다(p.103)

 

 

- 21세기의 대표 질병인 소진증후군이나 우울증 같은 심리 질환들은 모든 자학적 특징을 나타낸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폭력을 가하고 자기를 착취한다. 타자에게 오는 폭력이 사라지는 대신 스스로 만들어 낸 폭력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러한 폭력은 희생자가 스스로 자유롭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더 치명적일 수 있다(p.104)

 

 

- 자본주의 경제의 관심은 좋은 삶이 아니다. 이 경제는 더 많은 자본이 더 많은 삶을, 더 많은 삶의 능력을 나을 거라는 환상을 자양분으로 발전한다(p.112)

 

 

- 성공학 개론서들이 당신은 바로 당신 자신의 경영자입니다라고 말할 때, 그것을 한병철은 당신은 당신 자신의 자본가이며 착취자입니다라고 읽는다(역자 후기 중에서,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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