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이 필요한 시간/ 강신주 著
책을 말하다>
강신주라는 사람은 어느 새 꽤 유명한 대중적 스타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책을 읽어 볼 기회가 없던 중 독서모임을 통해 접하게 된 책이 ‘철학이 필요한 시간’이었다.
처음 접해 봤지만, 개인적으로 강신주의 강의보다는 책이 훨씬 느낌이 좋다는 것에 한 표를 던지게 됐다.
일단 이 책의 최대 미덕은 어려운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짧게짧게 그들의 주요한 생각을 비교적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정리를 했다는 것이다.
하이데거, 칸트, 들뢰즈, 니체같은 이름만 들어도 왠지 속이 울렁대는 이들의 철학적 핵심들이 쉬운 예시와 함께 잘 녹아 있다.
다만, 깊이가 없는 독자다 보니 이게 어느 정도 깊이인지에 대한 감은 별로 없다. 어쩌면 철학을 좋아하는 이들에겐 수박 겉핥기 일 수도 있겠고... 다만, 나같은 문외한들이 점점 더 철학에 흥미를 느끼도록 이런 류의 책들이 많아지는 건 나쁜 일이 아니겠다 싶었다.
책을 읽고 난 뒤 드는 생각 하나, 어떻게 이 책들의 내용을 삶에 적용할 방법은 없을까? 그 연결고리를 찾기가 만만치 않다. 철학이 생활 속에 녹아들 때 좀 더 철학은 사회에서 적절한 쓰임들을 찾지 않을까?
마음에 남다>
- 자유롭고 싶은가? 그렇다면 니체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만 한다. “지금 인생을 다시 한 번 완전히 똑같이 살아도 좋다는 마음으로 살아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p.26)
- 에픽테토스는 페르소나와 맨얼굴을 동시에 가지고 삶을 영위해야만 하는 인간의 숙명을 간파했던 철학자였다. 다시 말해 페르소나에 집착하다가 맨얼굴을 망각하거나, 혹은 맨얼굴에 신경 쓰다가 페르소나를 경시하는 것, 이 두 가지 극단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성찰로 인해, 우리는 삶에서 겪는 모든 고통과 갈등이 어디로부터 유래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맨얼굴을 드러내야 할 때에 페르소나를 쓰거나, 반대로 페르소나를 드러내야 할 때 맨얼굴을 보여주려 해서 발생하는 것이다(p.38)
- 안이건 밖이건 만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바로 죽여버려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척을 만나면 친척을 죽여라. 그렇게 한다면 비로소 해탈할 수 있을 것이다._임제어록 중에서
(중략) 임제의 사자후가 부처, 조사, 나한, 부모, 친척을 실제로 죽이라는 뜻은 아니다. 단지 미래나 과거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 현재의 삶을 가릴 때에만, 자신의 관념 속에 있는 부처, 조사, 나한, 부모, 친척을 죽이라는 것이다(p.50~51)
- '내가 없다‘는 주장은 부정적으로 ’내가 공하다‘고 표현된다. 이 주장을 긍정적으로 표현하면 ’나는 수많은 인연들의 마주침으로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당연히 이런 나에게 나의 것이란 존재할 수 없는 법이다. 그것은 모두 인연이 있어서 내게 잠시 머무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움도, 젊음도, 나의 아이도, 그리고 돈마저도 모두 그러하다. 그것들은 모두 인연이 되어서 나에게 왔고, 인연이 다해서 나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철저하게 나 자신이나 내가 가진 것이 공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리는 부질없는 집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도의 불교철학자) 나가르주나의 핵심적인 전언이다(p.61~62)
-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인간의 뇌는 가장 심층에 있는 ‘오래된 뇌’, 중간 부분에 있는 ‘중간 뇌’, 그리고 가장 겉에 있는 ‘새로운 뇌’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마치 지질학에서 다루는 지층처럼 오래된 뇌는 가장 먼 과거에 형성된 것이라면, 새로운 뇌는 가장 최근에 형성된 것이다. 뇌의 전기-화학적 반응을 측정하는 f-MRI(기능성 자기공명영상)기법을 통해 과학자들은 ‘오래된 뇌’, ‘중간 뇌’, 그리고 ‘새로운 뇌’가 관장하는 영역이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오래된 뇌’가 행동을 담당하고 ‘중간 뇌’가 정서를 관장한다면, ‘새로운 뇌’는 합리적인 사유를 담당하고 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 미래에 더 새로운 지층이 생기는 순간, 현재 새로운 지층은 낡은 지층으로 밑에 깔리데 된다는 사실이다.
지층과 마찬가지로 현재의 합리적 사유도 시간이 지나면 정서나 행동의 영역으로 이행한다. 이것이 바로 습관을 설명하는 현대 뇌과학의 방식이다(p.77~78)
-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낯섦이 찾아오는 바로 그 순간이 우리의 생각이 깨어나 활동하기 시작하는 시점이라는 것이다. 하이데거를 통해서 이제 우리는 자신이 항상 생각하고 있지는 않다는 점을 이해하게 된다. 분명 우리는 생각을 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항상 예상치 못한 사건과의 조우를 통해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중략)
아내는 남편에 대해, 혹은 남편은 아내에 대해 부단히 자신을 새롭게 가꾸어야만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자신이 상대방에 대해 낯섦, 혹은 사건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면, 상대방은 자신에 대해 별다른 생각이나 긴장감도 가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경우 대가가 필요하다. 더 이상 친숙한 상태로 상대방을 만날 수 없을 것이고, 당연히 정서적 안정도 심하게 훼손될 것이다. 그렇지만 [가구]라는 시에서 도종환이 말했던 가구와 같은 관계를 벗어나려면, 이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본래 가구들끼리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저 아내는 방에 놓여 있고/ 나는 내 자리에서 내 그림자와 함께/ 육중하게 어두워지고 있을 뿐이다”(p.85~86)
- 지눌에 따르면 마음과 수행에 대한 이론적 전망을 획득했다고 해서, 그것으로 해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왜 그럴까? 우리는 마음뿐만 아니라 몸도 가지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지눌이 이론과 실천 사이의 간극을 성찰했다는 사실을 직감하게 된다.(p.90)
-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모든 사람들은 자신만의 고유한 삶의 맥락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자신만의 고유한 언어 규칙을 따른다.(중략) 언어와 문화가 완전히 다른 외국인들을 만날 때는 그래도 상황은 좋은 편이다. 우리는 외국인들의 그들만의 삶의 규칙에 따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문제는 같은 언어나 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사람을 만날 때 발생하기 쉽다. 겉으로는 유사해 보이지만 그들은 지역, 가족, 학교, 전공 등등에 의해 나의 문맥과는 일치하지 않는 언어를 사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p.104)
- 자신의 마음을 다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것은 어떤 일을 할 때 자신이 가진 모든 힘을 쏟아붓는 것을 의미한다. 오직 그럴 때에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아무리 노력해도 할 수 없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자를 통해 자신의 본성을 알게 되고, 후자를 통해 자신의 한계를 알게 된다(p.108)
- 동양의 사유 전통에서 이상적인 인격, 즉 ‘군자’이든 ‘진인’이든 모두 생사에 초탈했던 이유는 다른 데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모두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극한에 이를 때까지 최선을 다해 수행했던 사람들이었다. 그 한계 상황에서 불행히도 죽음이 자신을 반기게 되더라도 그들은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였던 것이다. 아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죽음을 앞두고도 당당할 수 있었다(p.110)
- 가장 두려운 악인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우리와 함께 있지 않으며, 죽음이 오면 이미 우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죽음은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 모두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산 사람에게 아직 죽음이 오지 않았고, 죽은 사람은 이미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_에피쿠로스,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중에서(p.112)
- 현자는 죽음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그는 죽음을 기준으로 해서 삶을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그 자체로 향휴하는 사람이다. “현자는 단순히 긴 삶이 아니라, 가장 즐거운 삶을 원”하기 때문이다. 만약 말기 암이란 진단이 떨어진다면, 현자는 어떤 자세를 보일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그는 별다른 동요 없이 삶의 순간을 있는 그대로 즐겁게 향유할 것이다. 6개월 뒤 죽는다는 두려움으로 지금 주어진 소중한 삶을 회색빛으로 물들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p.116)
-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는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자유가 있다는 것을 인정했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자유가 없다면 책임도 있을 수 없다.(중략) 법정을 예로 들어 보자.(중략) 간단히 말해 검사는 피의자가 자유로운 사람이었다고(그래서 그 범죄를 선택하지 않을 수 있었다고), 변호사는 피의자가 부자유스러운 사람이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결국 재판은 범죄 행위에 대해 피의자가 어느 정도 자유로웠는지를 따지는 행위인 셈이다(중략) 그래서 우리는 알게 모르게 칸트의 후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는 인간의 윤리적 행위는 인간이 자유로울 때에만 의미가 있다고 주장했던 철학자이기 때문이다(p.121~122)
- 어느 경우든 조화라는 이념은 구성원들이 자신의 욕망을 억압하지 않는다면 실현 불가능한 것이다.(p.127)
- 집단에 매몰되는 순간, 집단에 속한 구성원들은 자신만의 고유성, 혹은 주체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전체주의는 이런 메커니즘으로 발생하는 것 아닌가?(p.128)
- 사르트르라면 컴퓨터나 의자와 같은 것을 ‘존재’라고, 인간을 ‘무無’라고 이야기했을 것이다. 그의 주저 [존재와 무]에 따르면 ‘존재’가 컴퓨터나 의자처럼 스스로 행위를 결정하지 못하는 부자유스러운 것들을 가리킨다면, ‘무’라는 것은 인간에게는 미리 주어진 본질이 ‘없다’는 것과, 그래서 인간은 스스로의 본질을 만들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상정한다. 구체적으로 말해 외적으로 규정되거나 결정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은 ‘무’, 즉 ‘주어진 본질이 없다’는 것이다(p.134)
- 자공이 물었다. “평생 동안 실천할 만한 한 마디 말이 있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바로 서恕다! 자기가 바라지 않는 일은 남에게 행하지 말아야 한다.”_논어 ‘위령공편’ 중에서(p.142)
- 정약용에게 인의예지라는 유학의 가치 덕목은 마음의 본성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주체적 노력과 실천을 통해서 달성될 수 있는 덕목들이다. 그래서 그는 인의예지란 가치 덕목은 우리에게 내재하는 본성이 아니라 ‘우리의 실천’을 통해서만 확립되는 무엇이라고 강조했던 것이다(p.149)
- 한나 아렌트는 더불어 살아가는 삶에서 ‘사유’란 하지 않아도 상관이 없는 ‘권리’가 아니라 반드시 수행해야만 할 ‘의무’라고 강조한다_‘예루살렘의 아히히만’에서(p.155)
- 예외는 있겠지만, 대부분의 공적 생활에서 대다수 사람들은 우울하고 슬픈 감정 상태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가족을 위해 그들은 그런 우울한 상태를 불가피하게 감내하고 있다. 이런 우리 상황을 본다면 스피노자는 어떤 느낌이 들까?(중략)
다행스럽게도 가족이나 연애와 같은 사적인 관계에서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다면, 그나마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 그렇지만 만약 이마저도 불가능하다면 과연 기쁨과 행복을 완전히 포기할 수 있을까? 아마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스피노자가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더 큰 완전성, 기쁨, 그리고 쾌활함을 추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업무가 끝난 뒤 오락거리를 찾아서 밤거리를 헤매는지도 모른다. 결국 우리에게 오락 산업은 슬픔과 불행에 붙이는 일회용 반창고인 셈이다(p.162)
- 선물을 받고 나면 항상 그 선물의 액면가와 유사한 대응물을 고르는 것이 우리의 일상적인 관례이다. 이것은 우리가 주고받는 대부분의 선물이 명목상으로만 선물일 뿐, 그 이면에는 뇌물의 논리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p.165)
- 신혼부부의 사랑을 유지시켰던 선물의 논리가, 마치 음식과 돈이 교환되는 식당에서처럼 뇌물의 논리로 변질되어버린 것이다. 여기서는 사랑도 기대할 수 없고, 선물 또한 기대할 수 없다. 이제 채권과 채무의 관계, 즉 뇌물의 관계만이 존재할 뿐이다(p.168)
- “일체의 대가 없이 네가 가진 것을 주어야만 한다.”, “수확의 기대 없이 심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_해체주의 철학자 데리다의 선물에 관한 말(p.169~170)
- 메를로 퐁티의 말은 우리 가슴을 알리게 한다. “우리는 순진무구함과 폭력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폭력의 종류를 선택하는 것이다. 우리가 신체를 가지고 있는 한 폭력은 숙명이다.” [휴머니즘과 폭력]에 나오는 말이다(p.171
- 이리가라이는 통상적인 페미니즘의 이미지를 거부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녀는 남성과 여성을 “평등하다”고 보는 견해 자체를 탐탁하지 않게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리가라이는 여성이 남성과는 구별되는 존재라는 확실한 입장을 견지한다(p.183)
- 흔히 소통이란 의사소통을 상징하는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의 번역어 정도로 이해되고 있다. 그렇지만 ‘트다’라는 뜻의 ‘소疏’와 ‘연결하다’는 뜻의 ‘통通’이란 글자로 구성되어 있는 소통이란 개념은 더 심오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소통은 구체적으로 막혔던 것을 터서 물과 같은 것이 잘 흐르도록 하는 작용을 나타내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통’이라는 개념보다 ‘소’라는 개념이 더 중요하다고 하겠다. 막혔던 것을 터버리지 않는다면, 물과 같은 것이 흐를 수 없다. ‘소’라는 개념은 우리 마음으로부터 선입견을 비운다는 것, 그러니까 장자가 말했던 ‘비움’이나 ‘잊음’과 같은 맥락에서 사용된다. 선입견을 비워야만 타자와 연결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을 것이다(p.193~195)
- 잊지 말자. 불교에서 모든 요동치는 마음을 극복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내부로부터 요동치는 마음은 극복의 대상이었지만, 외부로 인해 요동치는 마음은 긍정의 대상이었다. 전자가 타자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도록 만드는 마음이라면, 후자는 타자를 있는 그대로 조우하여 그에 섬세하게 반응하는 마음이기 때문이다(p.200~201)
- 공자는 인이 두 사람 사이의 조화로운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주체의 자세나 태도라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 인仁한 사람은 타자와 만났을 때 갈등의 관계가 아니라 조화의 관계에 들어갈 수 있다고 공자는 생각했던 것이다(중략) 유창하게 말을 잘 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당연히 이런 사람은 타자와 조화로운 관계에 들 수가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자는 제자에게 “말을 어눌하게 하라”고 이야기했던 것이다(p.204)
- 불행히도 논리적인 논증만으로 상대방을 설득시킬 수는 없는 법이다. 오히려 상대방은 논리의 힘으로 자신을 압박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과 소크라테스가 (공자에 비해) 간과했던 점은 바로 이것이었다(p.206)
- 웃음이란 경직된 것과 기성적인 것, 그리고 기계적이고 무반성적으로 이루어지는 행동들에 대한 인간의 본능적인 저항(p.220)
-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행을 소비자들이 집단적으로 특정 스타일을 선택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것은 원인과 결과를 거꾸로 본 것이다. 유행은 소비자들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산업자본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리오타르가 보았던 것도 바로 이런 산업자본의 생리였다. ‘새로운’ 상품을 내놓아 기존 상품을 낡은 것으로 만들면서, 소비자로 하여금 새로운 상품을 구매하도록 유혹하는 메커니즘을 산업자본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p.231)
- "베버가 말한 대로 프로테스탄티즘의 금욕주의가 자보주의 발달의 진정한 동력이라면, 그래서 소비보다 생산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산업자본이 만들어낸 엄청난 상품들은 어떻게 팔릴 수 있는가?” 좀바르트의 지적은 예리했다(p.235)
- 바타유의 일반경제론에 따르면 과잉된 에너지는 반드시 소모되어야 하지만, 다행스러운 것은 우리에게 선택의 자유가 있다는 점이다. ‘불유쾌한 파멸’의 길을 따라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전쟁이나 폭력의 길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유쾌한 파멸’의 길을 따라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증여의 길로 나아갈 것인가?(p.246)
- 자본주의는 상품을 가진 사람보다는 자본을 가진 사람에게 우월함을 보장하는 체제다. 노동력이란 상품만을 가지고 있을 때 자본가보다 열등한 지위에 있게 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그렇지만 월급을 받아 소비자가 되는 짧은 한순간, 상황은 180도 달라진다. 순간적이나마 노동자는 상품을 구매할 돈을 가지고 있고 자본가는 팔아야 할 상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순간 노동자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p.247)
- 지금까지 우리는 여가 시간을 노동으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운 시간이라고 착각했다. 그렇지만 여가 시간은 노동으로부터 “해방된” 시간이 결코 아니다. 대중매체가 제공하는 볼거리들에 사로잡히거나 상품을 구매하는 것으로 대부분의 여가 시간을 낭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여가 시간은 자유로운 창조의 시간이나 여유로운 휴식의 시간이 아니라, 자신이 만든 상품들로부터 유혹당하도록 고안된 시간인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 드보르는 여가 시간 동안 우리가 노동의 결과에 “굴복”하고 있다고 말했던 것이다(p.252~253)
- 예정된 만남, 혹은 필연적인 만남을 믿는 우리 속내에는 현재의 만남에 대한 무의식적인 소망이 있다. 사랑하는 애인을 만났거나, 마음이 맞는 친구를 만났거나, 혹은 원하는 직장을 얻었을 때, 우리는 모두 이런 만남이 자신에게 이미 예정된 것이었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소망스런 만남이었기에 우발적인 만남일 수 없다는 식이다. 우발적이라면 지금 자신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만남은 언제든지 막을 내릴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우리는 저주스러운 만남은 모두 우발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p.255)
- 덕은 무력이나 재력과는 다른 능력이다. 무력이나 재력으로는 몸을 잡아둘 수 있을 뿐, 마음을 얻기는 어려운 법이다. 그렇지만 덕은 마음까지 얻을 수 있는 능력이다. 그래서 덕이란 글자는 ‘얻는다’는 뜻의 ‘득得’이란 글자와 ‘마음’이라는 뜻의 ‘심心’이란 글자가 합성되어 있다(p.269)
- (덕을 발휘하는 것의 전제조건은 사람을 간파할 수 있는 능력의 유무에 있다.) 인간을 통찰할 수 없는 눈을 가진 군주에게 덕의 논리는 자멸로 가는 지름길일 수도 있었던 셈이다. 국운을 쇠망하게 했던 군주들 옆에는 항상 능력이 없거나 구변이 좋은 신하들이 가득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는 셈이다(p.271)
- 사랑은 ‘우발적으로 마주친 타자로부터 발생하는 기쁨’이란 첫 번째 계기와 ‘기쁨을 끈덕지게 유지하려는 노력’이란 두 번째 계기로 구성되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첫 번째 계기가 사랑이 주체의 절대적인 자유가 아니라 수동적인 조건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보여준다면, 두 번째 계기는 사랑이 주체 자신의 결단과 의지를 통해서만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p.286)
-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하나 있다. 우리는 고독하기 때문에 누군가를 사랑하고, 나아가 그 사람과 가족을 이루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고독하기 때문에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인가? 자세히 생각해보면, 그 반대가 진실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에만 고독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가 불행히도 나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을 때 버려졌다는 느낌이 들기 마련이다. 이것이 바로 고독의 실체이다(p.290)
- 현대 철학자들 대부분에게 있어 의미란 우발적인 마주침을 통해서 사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상전벽해라고 했던가? 현대에 이르러 철학적 국면은 완전히 돌변한 것이다. 지금은 우발성이 필연성의 논리를 압도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중심부에 들뢰즈라는 철학자가 있다.(중략)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과 마주치는 여행을 계속 시도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누군가를 만나서, 자신의 기쁨이 지속되는 한 그 사람과의 마주침을 끈덕지게 지속하게 될 것이다. 물론 기쁨이 사라지는 순간, 우리는 한때 기쁨을 주었던 그 사람에게 결별을 고하게 될 것이다. “굿바이! 나는 다시 여행을 떠날 거야! 너도 좋은 사람과 만났으면 좋겠어.”(p.298~301)
- 하위징아에 따르면 ‘노동’은 수단과 목적이 분리된 것이고, ‘놀이’는 수단과 목적이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건물공사장에서 모래를 나르는 사람들과 놀이터에서 모래를 나르는 아이들의 비유(p.302~303)
- 불행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즐거워하는 것을 버리고, 주위의 평판이나 경제적 이득 때문에 노동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스스로 비범해질 수 있는 길을 버리고 평범한 길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비록 그렇다고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차선책이 존재한다. 그것은 자신의 일에서 놀이가 가진 즐거움과 창조성을 되찾으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이다. 명심하자. 아이 때 경험했던 놀이의 즐거움을 되찾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행복한 삶은 그만큼 멀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p.307)
- 지금 우리는 대의민주정치를 따르고 있다. 우리는 대표자에게 자신의 권리를 일정 기간 양도한다. 그러나 과연 자신의 권리를 타인에게 양도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만약 권리를 양도했다면, 그 순간 우리는 권리를 가지지 않은 자, 즉 노예로 전락하는 것 아닌가? 물론 대표자를 뽑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에 주인행세를 하기는 한다. 그렇지만 그 순간을 제외하고 우리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결정 상황에 주인행세를 할 수가 없다(p.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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