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호한 생각, 막연한 기대
군인과 관련된 이야기니 먼저 군과 관련된 얘기를 하나 해보자.
짐 콜린스의 명저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Good To Great)’에는 베트남 전쟁 시 하노이 포로수용소에서 수용됐던 전쟁영웅 스톡데일 장군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전쟁포로였던 부하들을 최대한 생존시켜 고향으로 돌려보냈던, 당시 포로수용소 최고 계급의 인물로 무려 8년간의 수용소 생활을 했던 장본인이다.
그를 통해 알려진 바로는 당시 수용소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많은 이들은 스스로 지쳐 죽어가기도 했는데 이들의 대부분은 무모한 낙관론자들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다가오는 크리스마스에는...’ 등의 기대를 품고 지내다 그 기대가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점점 더 상실감에 빠지다 결국엔 스스로 견디지 못하고 죽어갔다고 한다.
그 어려운 상황을 견디고 이겨낸 사람들은 모두 현실적 낙관론자들이었다. 즉, 언젠가는 풀려나겠지만 현실을 직시하고 지금의 어려움을 제대로 살펴보는 사람만이 끝까지 살아남은 것이다. 유명한 스톡데일 패러독스(Stockdale Paradox)에 관한 이야기다.
내가 상담해 본 제대군인들의 경우는 대개 어느 정도의 사회적응을 준비하고 나왔다고 해도 여전히 사회에 대한 ‘모호한 생각과 막연한 기대’를 단기적으로 품고 있는 이들이 많았다. 이들은 흔히 단기로는 낙관적인 모습을 보이다가 실업이 장기화되면서는 지나치게 비관적으로 변해간다. 퇴직 시의 모호한 낙관과 기대는 일반적인 직장인들도 많이 가지는 것이니 사회경험과는 동떨어진 생활을 했던 군 출신자들에게 이런 현상이 많은 것을 그들의 탓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문제는 그로 인해 피해는 고스란히 당사자가 져야 한다는 것이다.
모호한 생각과 막연한 기대라는 바탕에서 제대로 된, 구체적인 사회생활 준비를 기대하긴 어렵다. 퇴직 후 처음으로 부딪히는 현실은 어느 정도 준비를 했다고 해도 늘 당혹스럽다. 그런데 애매한 낙관주의에 젖은 상태라면 더욱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 대개 치명적인 악수는 당황스런 상태에서 연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조급한 마음에 급하게 추진된 사업시도가 대표적인 예이다.
눈 먼 낙관주의도, 과도한 현실인식에 패배감에 젖은 비관주의자도 아닌 현실적인 낙관주의자가 되자. 지피지기(知彼知己)는 지휘관의 금과옥조가 아니던가. 냉정하게 현실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리고 하나씩 준비해 나가다 보면 장기적으로는 승리할 수 있다.
연금, 결단력을 무력화시키는 마술
군 예편자, 공무원 퇴직자, 학교 퇴직자들의 공통점은 무얼까?
커리어 컨설팅을 하는 사람으로 느끼는 이 분들의 공통특징은 ‘유난히 취업관련 사회 재적응에 어려움이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연금 대상자’라는 사실이다.
이 두 가지 사실은 은근히 예시하는 바가 크다. 연금은 많든 적든 최소한 한 가지 역할은 분명히 하는 것으로 보인다. 최소한의 생계유지를 위한 지지대 역할이 그것이다. 요즘은 그마저도 어려움이 있지만 어쨌든 연금을 받는 퇴직자들과 그렇지 못한 퇴직자들의 이후 반응은 그로 인해 크게 차이가 난다.
연금 수혜자들의 경우, 최소한의 안정감이 있다는 것은 분명히 장점이나 이것은 과감한 결단력에 잠금장치를 해버리기도 한다.
군을 떠난 후 어떤 식으로든 결단을 내려야하는 경우가 많음은 당연하다. 그것이 눈높이 조절을 위한 결단이건 혹은 그렇지 않다면 기존의 생활수준 이상을 위한 모험을 감행하는 과감한 시도건 간에 말이다.
갈수록 나아지곤 있지만 연금 수혜자 중의 많은 분들이 처음 사회에 나와서 몇 번의 시도 후 잘 되지 않자 아예 직업전선에서 ‘사실상 은퇴’를 해버리는 경우가 있다. “먹고 살 만한데 굳이 그런 일을 할 이유가 없다”. “그렇게까지 할 바엔 차라리 여행이나 다니겠다”는 항변은 전혀 이해가 안가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결국 이런 분들도 대개는 1~2년이 지나면 ‘쉬는 것에 지쳐’ 직업시장에 돌아오곤 한다. 문제는 그땐 이미 더 상황이 나빠졌고 그나마 가지고 있던 군 경력활용의 기회마저 없어진 후라는 것이다.
연금은 최소한의 생활의 축이다. 그리고 예편 이후의 내 삶은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다. 갑자기 가족 내에 변고가 생겨 큰돈이 들어갈 수도 있고, 전혀 예측치 못한 변수로 크게 흔들릴 수 있는 것이 삶이다.
연금은 할 수만 있다면 없는 것으로 마음속에 치부하는 것이 좋다. 굳이 돈의 문제가 아니라도 일없는 삶은 공허하기 그지없다. 과로만큼 빨리 늙어가는 지름길이다.
노인들에겐 네 가지 괴로움이 있다고 한다. 이른 바 고령자들의 사고(四苦)로 ‘가난, 질병, 고독, 역할상실’을 의미한다. 이른 조기은퇴는 이러한 네 가지 괴로움을 바로 선택하는 결정이나 마찬가지다. 50대 퇴직자라도 앞으로 40년 정도는 더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정말 무모한 선택에 다름 아니다.
군 출신의 인적 자원은 나름의 충분한 매력이 있다. 절제된 자기관리, 뛰어난 추진력과 통솔력, 영육의 강인함 등은 다른 어떤 특정집단에서도 흔히 보기 힘든 자질들이다. ‘스스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라고 말할 정도로 자신감도 있는 사람들이다.
필자가 상담 시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어떤 경주에서 지금까지 누군가 잘 달려 왔다면 이후의 경주에서도 그가 승리할 확률은 훨씬 높다는 것이다.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만은 아니다. 한 나라의 기둥으로 열심히 살아 온 사람들이 그 다음 인생에서도 또래들과 견주어 더 좋은 성과를 낼 가능성이 많다는 것은 오히려 합리적인 기대치가 아닐까? 단, 위에 언급한 두 가지만 잘 통제할 수 있다면 말이다.
(2012년 1월 다시 웃는 제대군인 기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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