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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노트

일의 발견/ 조안 B. 시울라 著

by 사람과 직업연구소 2011. 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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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은 항상 우리를 배신하는가?‘란 부제를 보자마자 관심이 일었던 책이다. 저자의 표현처럼 이 책은 우리 삶에서 일과 직장이 갖는 의미를 집요하게 추구하고 있는 저자 조안 B. 시울라가 일의 의미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변해왔는지, 왜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는 것이 항상 자유와 통제간의 투쟁인지, 그리고 일과 소비가 어떻게 우리 삶의 방식을 지배하게 됐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최근에 본 책 중 일과 관련한 가장 통찰력 있는 책이 아닐까 싶을 만큼 일에 관한 깊은 사고와 분석을 담고 있다.

일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와 그를 이용하려는 고용주, 그리고 인간의 자체적 성향으로 인해 어떤 식으로 일이 우리의 삶속에서 변화의 과정을 밟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개별적으로 좋은 내용에도 불구하고 한번 읽어서는 내용의 개요를 잡아내기 어렵다는 단점도 있다. 덕분에 요약 노트가 엄청나게 길어졌다.^^

  

 

마음에 남은 글들>

- 일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약속하는 경우가 많다. 일에 도덕적 가치를 부여하는 노동관을 뛰어넘어, 이제 일은 우리 정체성의 주된 원천이자 개인적인 자존감과 행복의 주요 원인이 되기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일은 때로 우리가 가족과 친구들, 종교, 공동체로부터 얻곤 했던 만족감을 대신한다. 이러한 대체(substitution)'는 위험하다. 왜냐하면 예측 불가능한 경제상황에서 고용인들은 때로 무기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은 또한 우리 삶을 파괴할 수 있다. 회사가 구조조정을 할 때, 그것은 일부 사람들에게는 지나치게 많은 일을 주고,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일도 주지 않는다. 덕분에 두 집단 모두 불확실한 미래와 맞닥뜨리게 된다. 과로와 실직은 개인과 가족에게 크나큰 긴장을 야기한다.(p.8)

- 마치 좋은 직업이 행복에 이르는 유일한 열쇠인 양 많은 사람들은 맹렬하게 성공을 추구한다.(p.9)

- 어떤 사람들은 매주 70시간씩 일해서 돈을 번 후, 40세에 은퇴하겠노라고 주장한다. 소수의 사람들은 그렇게 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꿈을 이루지 못한다. 이런 마음가짐은 오히려 외로움과 이혼, 때로는 화이트칼라 범죄같은 사회적 대가를 불러올 수 있다. 반면 단지 먹고살기 위해, 혹은 실직하는 것이 두려워 오랜 시간 일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일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의 행복을 시장이나 고용주의 손에 맡겨두는 결과를 가져온다. 괜찮은 삶을 사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는 그 이상의 것을 원한다.(p.9)

- 여러분이 일을 더 많이 해서 자본가들에게 더 많은 이익을 남겨줄수록 여러분의 실제 노동가치는 줄어든다.(p.11)

- 몇몇 사람들에게 일은 일상의 굴욕이었다. 그들의 굴욕은 그들이 하는 일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동료들이나 상사의 멸시와 부당함으로부터 비롯된다.(p.11)

- 우리는 그 일이 우리를 원하는 곳으로 이끌어주거나, 적어도 원하는 길을 가는 동안 우리를 먹여 살려줄 것이라고 기대할 때, 그 어떤 최악의 일이라도 견딜 수 있다.(p.12)

- 회사는 사업상의 저녁식사, 회사의 맥주파티, 스포츠행사, 친목행사 등의 명목으로 고용인들의 여가시간을 빼앗음으로써 노동자의 소외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의미를 만들어내야 할임무를 부여받은 경영진은 고용인들이 자신의 더 많은 부분을 필요 이상으로 일에 투자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새로운 방법들을 시도했다. 평범한 일이 있어 보이도록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힌 것이다.(p.13)

- 오늘날의 일은 대부분 우리 사생활의 일부를 포기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과거의 노동자들이 단지 과로했을 뿐이라면, 오늘날의 많은 노동자들은 과로할 뿐 아니라 과도한 통제를 받고 있다. 하루가 끝날 무렵 노동자들의 얼굴을 덮고 있는 피로는 육체적인 것이 아닌 정신적인 것이다.(p.14)

- 실직의 문제점은 당신이 단 하루의 휴가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p.22)

- 여가는 단순한 자유시간이상이다. 그것은 일에 대한 욕구와 필요성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이며, 특정한 일을 하기 위한 기회이다. 직업을 잃었거나 직업을 가질 수 없는 사람들은 결코 일에서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일할자유를 갖고 있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그 문제에 대해 아무런 선택권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p.23)

- 인간의 가장 흥미롭고 독특한 점은 자신의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고 난 에도 스스로 일하기를 선택한다는 점이다.(p.24)

- 이솝의 개미와 베짱이 우화는 주의해서 해석해야 한다. 이것은 일하는 삶이 노래하는 삶보다 낫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당신이 노래하기를 원한다면 그 대가를 치를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p.28)

- 그는 자신이 원하면 언제든 일에서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내키는 대로 일할 수 있었다. 당신이 일을 할 수도 안 할 수도 있을 때, 일은 매우 다르게 느껴진다.(p.33)

- 만약 우리가 필요로 하는 물건을 얻기 위해 굳이 일하지 않아도 되는 유토피아에서 산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아마도 우리는 놀면서 일하는 대신, 일하면서 놀 것이다.(p.35)

- 만약 당신이 다른 무엇보다 돈과 안정성을 중시한다면, 일은 주로 이러한 목적을 얻기 위한 수단인 도구적 활동이 된다.(p.39)

- 대체로 우리가 직업을 선택할 때는 그 선택으로 인해 다른 가치들을 어느 정도 잃게 되더라도 감수해야 한다.(p.40)

- 우리들 대다수는 우리가 정말로 하고 싶어하는 일의 표상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그 일을 하기 위해 현재 직업이 주는 안정과 권력, 구매력을 감히 포기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p.42)

- 여성들이 원하는 것은 단지 일할기회가 아니라, 집에 머무는 것과 일하는 것 사이에서 진정한선택권을 갖는 것이다.(p.44)

- 일은 일 이외의 삶을 잠식한다.(p.44)

- 대체로 이라고 불리는 활동들은 우리가 다른 것을 하지 못하게 막는다. 그래서 우리는 암묵적으로 을 다른 유형의 활동보다 덜 바람직한 것으로 가정한다.(p.52)

- 노동은 고통이고, 형벌인가? 시시포스와 다나이드를 괴롭힌 것은 세 가지이다. , 소모적이고 지루한 과업, 자유의 상실, 무의미하고 헛된 일이 그것이다.(p.58)

- 고통스럽고 지루하며 육체적으로 고된 일이라도 그 일을 하는 사람에게 목적이 있다면 그 자체로는 벌이 아니다.(p.59)

- 일은 보수를 받는 것과 받지 않고 행하는 활동까지 가리키는 반면, ‘업무는 보수나 소득을 얻는 일에만 구체적으로 관련된다는 것이다.(p.61)

- 일은 아담의 저주에서 신이 내린 소명으로, 그리고 삶의 목적이 되었다.(p.64)

- 돈을 벌거나 지키는 일에 일생을 바치는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사는 것 자체에만 열중할 뿐 잘 사는데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다.(p.66)

- 사람들은 살 수 있는 물건이 더 많을 때 더 많이 일하게 되는 것이다.(p.81)

- 인간이 자신의 일을 정의하는 것이지, 그 반대는 될 수 없다. , 일이 인간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일을 정하는 것이다.(p.83)

- 프로테스탄트 노동윤리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사람들에게 모든 종류의 일과 모든 노동자들을 똑같이 존중하도록 가르쳤다는 점이다.(중략) 루터와 칼뱅의 노동윤리에서 가장 오랫동안 사람들을 구속해온 믿음은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은 선하고, 일하지 않거나 열심히 일하지 않는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열등하다는 것이다.(p.86)

- 당신의 소명은 신이 결정하지만 천직은 당신 스스로 발견하는 것이다.(p.87)

-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이 천당보다는 가정에 좀더 가까운 무언가를 약속해주길 바란다.(p.89)

- 프랭클린은 자서전에서 성공을 위해 필요한 열한 가지 미덕을 열거하는데 절제, 침묵, 규율, 결단, 성실, 중용, 청결, 평정, 순결, 겸손이 그것이다. 그 는 현세에서의 금욕주의를 설교했지만 또한 돈이 목적에 이르기 위한 수단이라고 믿었다. 그 목적은 바로 생을 즐길 수 있는 자유였다.(p.93)

- 산업화 이후부터는 일에 대한 두 가지 유형의 견해가 존재했다. 첫 번째 견해는 계몽주의적인 것, 즉 과학과 지식이 진보로 이어진다는 것이다.(중략) 두 번째 견해는 장 자크 루소와 같은 비평가들이 말한 것으로, 일이 일종의 은총받은 상태로부터 타락했다는 것이다.(중략) 루소는 인류가 타인의 노동으로부터 이득을 취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부터 일의 황금기는 끝났다고 믿었다.(p.102)

- 마르크스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일과 동일시하는 것을 위험하다고 여겼는데, 특히 사람들이 자신의 일에 대한 선택권을 거의 갖지 못하고 매우 세분화된 일을 할 때 그러했다.(p.103)

- ‘일의 의미에 대한 모리스의 흥미로운 통찰가운데 하나는 가치 있는 일에 대한 그의 설명이다. 모리스는 일이 삶의 빛이 될 수도, 혹은 삶의 짐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 둘의 차이점은 첫 번째 경우에는 희망이 있는 반면, 두 번째 경우는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P.105)

-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할 때, 즉 고용되어 일할 때에는 고된 일더 나은 삶을 동일시하기가 더 어렵다.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함으로써 우리는 이미 자신의 일에 대한 통제권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일과 관련된 문제들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노동을 이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에 이미 시작된 것이라는 루소의 주장은 옳다.(p.112)

-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일하러 갈 때 자신의 헌법상의 권리를 주차장이나 버스에 두고 간다.(David Ewing, 회사에서의 시민의 권리에서 인용, p.115)

- 고용주나 경영자는 항상 자신의 뜻을 고용인들에게 강요하려는 유혹에 직면한다. 고용인들은 여러 시대에 걸쳐 직장에서의 자율성과 존엄성을 유지하기 위해 분투해왔다. 자유의 원칙은 이러한 관계의 중심에 있으며, 일에 대한 우리의 생각에 기본이 된다. 일할 자유, 일터에서의 자유, 그리고 일로부터의 자유.(p.117)

- 노예제도는 사람들에게 일을 시키는 방법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확실한 방법이다.(p.117)

- 다른 사람의 삶이나 경제적 안녕에 대한 전적인 통제는 중독성이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도덕적으로 타락시키지 않으면서 난폭한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이는 매우 드물다.(p.120)

- 나중에 자신의 사업을 하기 위해 지금은 어쩔 수 없이 하기 싫은 일을 하고 있다는 환상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p.121)

- 한 개인이 자신의 일을 선택할 수 있다고 해서, 그 사실이 고용주의 학대를 반드시 정당화해주지는 않는다. 문제는 한 개인이 얼마나 많은 선택권을 실제로갖고 있는가이다.(p.127)

(중략) 소도시에 살고 있고 부양할 자녀가 넷이나 되는 미혼모 역시 어디에서 일할지를 선택할 자유를 갖고 있다. 하지만 사실상 선택의 여지는 거의 없다. 우리 모두는 일을 선택할 자유를 갖고 있지만, 모든 사람들이 실행 가능한 선택권을 갖는 것은 아니다.(p.129)

- 때로 고용주들은 고용인들이 갖고 있지 않거나 원하지 않는 욕구를 충족시킨다.(p.131)

- 우리 모두 정도는 다르지만 생계를 꾸리기 위해 우리의 노동과 시간을 팔아야 한다.(중략) ‘자유의 매매라는 개념은 때때로, 특히 한 개인이 필사적으로 직업을 필요로 하고, 선택권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노동의 매매에 수반된다.(p.132)

- 기이하게도, 관료조직에서는 사람들이 직위로부터 얻는 권력은 업무에 대한 지식과 기술에 근거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중략) 어떤 이들에게는 사람과 관계에 대한 지식이 업무에 대한 지식보다 일을 하는데 더 유용하다.(p.133)

- 1900년에서 1930년 사이, 세 가지 혁신과 운동이 일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고, 그로 인해 오늘 날 우리가 아는 것과 같은 일터가 형성되었다. 과학적 관리법, 복지 자본주의, 그리고 경영에서의 인간관계 접근이 그것이다. 이들 모두는 노동자들을 길들였을 뿐 아니라 일을 이전보다 훨씬 더 복잡한 사회적,심리적 경험으로 만들었다.(p.138)

- 사무직 노동의 증가는 경영에서의 인간관계적, 심리적 접근을 새롭게 적용하도록 만들었다. 깨끗하고 매력적인 사무실에서 정신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집과 차, 그리고 고급 주방설비 비용을 지불하기 위해 자아의 침몰이라든지, ‘권위에의 복종같은 작은 모욕들을 기꺼이 감수하고자 했다. 그들은 직장에서의 자유시장에서의 자유와 교환하고자 했다. 계약제 하인과 산업 노동자가 장시간의 육체노동을 그들의 알량한 아메리칸 드림과 교환했다면, ‘조직인은 영혼의 일부를 포기해야만 했다.(p.158)

- 밀스는 사무직 노동자를 새로운 작은 사람(new little man)”이라고 불렀는데, 그는 정치적으로 무관심하고, 뿌리가 얕아 충성심이라고는 없으며, 항상 서두르지만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다.(p.162)

- 밀스는 사무직 근로자가 조직의 목적에 적합한 사람이 되도록 조직에 의해 심리적으로 강요당하며, 자신의 개성을 팔아버렸기 때문에 이후 일 외의 부분에서는 천박하고 보잘 것 없는 삶을 살도록 운명 지워진다고 주장했다. 사무직 근로자는 집에서도 일터에서와 마찬가지로 행동한다.(중략) 밀스가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은, 소외는 문제가 될 수도 있지만 해결책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가 비난한 일과 삶의 분리가 현대 조직에서는 일에 대한 가장 건전한 대응일 수도 있다.(p.163)

- 욕구야말로 사람을 움직이게 만드는 전부라고 가정하는 것은 인간의 열정, 이상, 가치가 갖는 힘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자신의 가치나 자신에게 중요한 것에 기반한 선택을 한다.(p.172)

- 고용주들은 고용인들이 부가가치를 창출한 대가로 보수를 받는다고 믿기를 바라지만, 사실 고용인들에게 그것은 자유를 상실한 대가이다.(p.179)

- 완전한 육체노동에 종사하지 않는 한, 근로자들에게 있어 일의 가장 힘든 부분은 정서적인 노력이다.(p.181)

- 제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제품을 생산하는데 지적 능력을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이 만들어낸 상품으로부터 소외감을 느낀다.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서비스를 제공할 때 자신의 실제 감정을 항상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자신의 서비스로부터 소외감을 느낀다.(p.183)

- 일하면서 미소까지 지으라고 요구하는 것은 정말 끔찍한 일이 될 수 있다. 한 슈퍼마켓의 점원들은 저의 약속: 웃거나 인사하지 않으면 저의 1달러를 가져가세요라고 쓰인 명찰을 달고 있어야 한다. 그들은 웃지 않으면 고객 앞에서 정말로 벌을 받는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모욕을 당한다........알리 러셀 혹실드의 인용 에서(p.184)

- 혹실드는 자신의 직업과 지나치게 동일시된 근로자는 정서적으로 소진될 위험이 있다고 말한다. 반면 직업을 자신과 동일시하지 않는 근로자는 스스로를 위선자로 여기며 모욕을 느낄 것이다. 자신의 직업을 연출된 일로 여기는 사람은 그것에 더 잘 대처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역시 일에 대한 일종의 냉소주의를 갖게 될 것이다.(p.184)

- 소외는 대개 일에 대한 개인의 통제나 선택의 자유가 결여됨으로써 생겨난다.(중략) 문제는 오늘날의 고객들은 이제 어떤 상황에서든 미소짓는 서비스만을 기대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객을 다루는 고용인들의 정서적 긴장은 그들의 자발적인 정서 반응의 범위가 축소될수록(자발적인 정서 반응이 적을수록) 증가할 것이다.(p.184~185)

- “업무상 사교는 모순 어법이다. 그것은 업무도 아니고 사교도 아니다.(p.197)

- 많은 조직들이 중간 관리자를 제거하여 조직의 위계를 수평적으로 만들고 있었다. 이것은 조직 내에서의 책임이 아래로 밀려내려가고, 고용인들 스스로 자신의 일에 대해 더 많은 책임을 지도록 기대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권한위임 혹은 리더십 프로그램들은 때로 교묘한 조작이기도 했다. 권한위임은 사람들로 하여금 더 많은 일을 하게 만들거나, 실제로는 그들이 갖고 있지 않은 권력을 더 많이 갖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을 의미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p.198)

- 경영학 이론의 유행주기는 10년에서 1년으로 짧아졌다.(p.201)

- 1950년대의 고용인들은 조직에 순응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그들은 감수성 훈련을 경험했다. 1980년대, 그들은 조직문화를 형성하기 위해 회사와 사교 모임에 참여했다. 그리고 1990년대, 이제 훈련은 팀 만들기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고용인들은 방안에서 마룻바닥을 기어다니기보다는 넓은 야외에서 로프에 매달려 있게 되었다.(p.202)

- MIT의 폴 오스터만 교수는 1992년부터 1997년 사이에 500개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품질과 생산성을 향상시키기 위해 팀을 활용했던 회사들은 팀원들이 노조를 결성하지 않는 이상, 팀과 수익을 공유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p.204)

- 컨설턴트인 존 카젠바흐가 지적하듯이, 회사 내의 팀들은 대부분 팀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기분 좋게 느끼기 위해 팀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개인들의 집단에 불과하다.(p.204)

- 과학적 관리법은 근로자들을 전문가로 변화시키고, 일을 지루한 것으로 만들었다. 리엔지니어링은 고용인들을 만능일꾼으로 만듦으로써 일을 보다 다양하고 흥미로운 것으로 만든다. 20세기의 경영 이론 전체를 마감하면서, 과학적 관리법과 리엔지니어링은 모두 생산 속도에 관심을 가졌다.(p.215)

- 마이클 해머는 리엔지니어링은 더 적은 인원으로 더 적은 일을 하는 것을 의미하는구조조정이나 조직개편과는 다르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리엔지니어링은 더 적은 인원으로 더 많은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더 적은 인원으로 지금 하는 일을 계속할 뿐이라는 논리적 추론에는 미치지 못했다.(p.217)

- 고용인들 대다수는 가족과 보낼 시간이 더 많이 필요하다고 보고했다. 그에 따라 아메르코는 그들이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관대한 정책들을 만들었지만, 시간이 부족하다고 답한 사람들 중 누구도 이러한 정책을 이용해서 근로시간을 줄이려 하지 않았다.(중략) (회사의 생산관리자이자, 두 아이의 엄마인 린다와의 인터뷰를 통해) 직장은 집보다 더 그녀에게 우호적이고, 그녀를 더욱 지지해준다. 혹실드는 많은 사람들에게 직장은 집이 되고 집은 직장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직장으로의 도피라는 개념 자체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남자들은 항상 직장을 불행한 결혼생활이나 배우자와 아이들로부터의 피난처로 이용해왔다. 가족들은 그의 고용인들처럼 그에게 복종하거나 그를 동경하지 않는다. 여성들이 직장을 도피처로 사용한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특히 그들 자신이 집에서 인정받는다고 느끼지 못한다면 말이다.(p.218/ 알리 러셀 혹실드의 시간묶기에서 아메르코에 대한 조사 )

- 1990년대의 커다란 아이러니 중 하나는 실제 경영에 있어서는 구조조정을 강조했던 반면, 당시의 경영서들과 경영학적 수사법들은 헌신”, “충성”, “신뢰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것이다.(중략) 헌신이 직장에서 보내는 시간으로, 충성이 보수의 대가로, 신뢰가 법적 계약으로 한정되면, 이들 용어에 담긴 도덕적 의미는 사라지고, 직장은 도덕적 파산 상태에 이르게 된다.(p.223~225)

- 직장을 하나의 대가족으로 만들려는 1980년대의 시도는 많은 근로자들이 의심했던 대로 모두 거짓이었다. 일반적으로 가족은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이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구처럼 집이란 가고 싶을 때 언제든 갈 수 있는 곳이고/ 언제든 당신을 받아주어야 하는 곳이다. 우리는 이젠 그렇게 해줄 직장을 갖고 있지 않으며, 고용인들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다.(p.225)

- 기업들은 지난 20년간 자신들의 이윤을 고용인들과 공유하지 않았다. 대중은 기업의 이윤과 중역들의 보수는 증가하지만 자신들의 임금은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을 지켜보았다.(p.227)

- "만약 근로자들이 기업의 열매를 공유하지 못한다면, 그리고 직업안정성이나 꾸준한 임금상승을 약속받지도 못한다면, 그들은 무슨 도익를 가지고 그들의 상사처럼 열심히 일하겠는가?“

(프랜시스 후쿠야마: 사회적 미덕과 부의 창출, 뉴욕 프리프레스 1995) 데이비드 고든은 이러한 사태가 채찍전략을 요구한다고 결론 내린다. , 근로자들이 위와 같은 이유로 인해 제대로 일하지 않으니, 그들을 위협하거나 혼내줄 관리자들이 더 많이 필요하다는 것이다.(p.228)

- 오늘날에도 불성실한 경영자들은 갈등과 사기 문제를 피하기 위해 근로자들에 대한 평가를 부풀린다. 그리고 이러한 경영전략은 어느 정도 성공했다. 임금 인상은 억제되었고, 노동조합 참여는 감소했으며, 남아있는 노조들의 힘도 약해졌다. 힘의 균형은 압도적으로 고용주에게 유리한 상태가 되었다.(p.229)

- 일을 보다 흥미롭고 만족스러운 것으로 만들려는 시도는 본래 그 자체로는 훌륭한 의도이다. 그러나 근로자들이 부당한 임금을 받고도 열심히 일하도록 만들기 위해 일을 더 그럴듯해 보이게 하는 것은 착취다. 모든 사람이 일에서 의미를 찾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당한 보상을 원한다. 회사의 이윤을 창출한 대가로 근로자들에게는 파티나 열어주고, 고위 관리자들에게는 엄청난 상여금과 스톡옵션을 지급하는 조직에는 무언가 부정직한 것이 있다.(p.232)

- 우리에게 미래를 통제할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면 일은 중요하다. 그 반대도 또한 사실이다. 윌리엄 줄리어스 윌슨이 말했듯이 일은 사람들에게 자기 효능감을 준다. 그리고 윌리엄 모리스의 말처럼 가치 있는 일은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인간이 경제를 통제하고 경제를 책임지며, 직장에서의 개인의 노력이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믿음이 없으면 일에 대해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다.(p.233)

- 미래의 불확실성에 근거한 미묘한 두려움은 많은 이들로 하여금 필사적으로 일에 매달리도록 만든다. 우리들 대다수는 어떤 막연한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더 오랫동안 일한다.(p.235)

- 냉소주의자들은 아무것도 믿지 않고, 단결하여 조합을 형성하지도 않고, 저항하지도 않기 때문에 혁명론자들 보다도 함께 일하기가 훨씬 더 어렵다. 대신에 그들은 봉급을 받을 때 수동적인 저항과 비웃음으로 침묵의 파업을 행한다.(p.238)

- 버지니아 지역의 노동 동원을 맡은 현장 지도자인 도리스 크루즈는 근로자들이 정당하게, 존엄과 존중을 가지고 대접받도록 고용주들이 보장하지 않는 것에 놀랐다고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돈조차 들지 않기 때문이다”(p.241)

- 현대인의 삶에서 가장 아이러니한 것은 우리가 전보다 더 오래 살고 있으면서도, 해야 할 일이 더 많아졌기 때문에 시간은 더 없는 듯 보인다는 것이다.(p.247)

- 우리가 더 빨리 일할수록 우리의 시간은 더 빨리 새로운 일로 채워진다. 우리가 더 빨리 움직일수록 우리는 더 적은 시간을 갖게 된다. 사람들이 속도에 집중할수록 서로에 대한 인내심은 점점 줄어든다. 또한 빠르게 돌아가는 삶은 스트레스를 유발하고, 사람들은 자유시간이 전혀 없다고 불평한다.(p.254)

- 1900년대 초, 헨리 포드는 사람들을 착실한 근로자로 변화시키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을 탐욕스런 소비자로 만드는 것, 즉 충분한 임금과 쇼핑하기에 충분한 시간을 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두 가지 모두 기업에 이득이 되었다.(p.257)

- 그들은 단지 기술을 파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시간을 파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그 시간 동안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자유를 파는 것이다.(p.258)

- 시간에 맞춰 일하는 것에 저항했던 산업화 이전의 우리 조상들과 시간과 과업에 의해 구조화된 일을 하는 현재 사람들의 상태는 일과 시간에 대해 세 가지 사실을 암시한다. 첫째, 아마도 과업 지향적인 일이 시간 지향적인 일보다 더 자연스럽고 만족스러운 듯하다. 둘째, 아마도 우리들 대다수는 짧은 시간 동안 열심히 일하고 긴 자유시간을 갖는 것을 더 좋아할 것이다. 셋째, 그러나 우리 문화에 존재하는 시간에 대한 엄격한 통제를 고려한다면, 일정한 노동시간이 정해지지 않을 경우 사람들은 엄청난 혼란에 빠질 것이다.(p.264)

- 미국기업의 46%는 탄력적인 출근시간을 갖고 있으며, 23%는 압축적 노동시간을 허용하고 있다.(미국인사관리협회)(p.265)

- 일이 개인의 시간을 몽땅 차지하거나, 그 사람이 가진 에너지 전부를 소진할 때 집은 더 이상 직장으로부터의 도피처가 되지 못한다. 그것은 또 다른 직장이 된다. 알리 러셀 혹실드가 발견했듯이 일부 사람들은 사무실에 있는 직장을 집에 있는 직장보다 더 선호한다.(p.267)

- 신기술은 우리에게 더 많은 자유를 주었지만, 그것은 잠재적으로 우리를 하루 24시간, 1365일 내내 고용인으로 만든다.(p.271)

- 항상 일만 하는 것에 대해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은 곧 대면시간(face time)", 즉 일과 후 직장에 남아 있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대면시간은 고용인들이 실제로 일을 하기보다는 이미지 형성을 위해 일하는 모습을 드러내는 상징적인 의식(simbol ritual)'이다.(p.274)

- 알베르 카뮈가 말했듯이, 일이 없으면 삶 전체가 타락한다.” 그러나 자유시간이 없어도 삶은 타락할 수 있다.(p.275)

-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여가를 갖기 위해 일을 한다고 말했다. 여가는 인간의 가장 훌륭하고 독특한 능력, 즉 생각하고 느끼고 반성하고 창조하고 배우는 능력을 이끌어낸다. 우리는 지혜를 발전시키기 위해 여가를 필요로 한다.(중략) 그리스어, 라틴어, 스페인어 모두 여가가 마치 생활의 중심인 것처럼 일을 여가와 관련시켜 비유한다. 영어단어 레저(leisure)는 라틴어의 리케레(licere)로부터 파생되었는데, 그것은 허락하다라는 의미이다. 영어에서는 마치 일이 생활의 기준인 듯 여가를 일에 빗대서 표현하고 있다. , 우리가 일을 멈추도록 허락되었을때가 여가라는 것이다. 영국의 수필가이자 자칭 일벌레인 G.K. 체스터턴은 여가가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다고 기술했다. “첫 번째는 무언가를하도록 허락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어떤 일이든할 수 있도록 허락되는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이자 아마도 가장 드물고 귀중한 부분)아무 일도 하지 않도록허락되는 것이다.”(p.276~277)

- 사회학자인 세바스티안 디 그라치아는 <시간과 일, 여가에 대하여>라는 책에서 일이 우리를 고상하게 만들고 피로하게 하고 부유하게 만들어줄지라도, 정작 우리를 인간으로서 완전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여가라고 주장했다.(중략) 디 그라치아에게 여가는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특별하게 지적인 상태이다. 그것은 단순히 조직화된 활동이나 오락, 휴양 및 자유 시간을 넘어서는 것이다.(중략) 일 안에 사회적 계층이 존재하는 것처럼, 일 바깥에도 사회적 계층은 존재한다.(p.277)

- 종교 개혁은 일을 강조하는 것과 함께 일요일을 지루한 날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중략) 신교도들은 일을 미덕과 연관시킨 반면 여가는 악덕과 관련시켰다. 디 그라치아에 따르면, 사업가들은 일요일을 우울하고 지루한 날로 만들려는 아이디어를 좋아한다. 그렇게 하면 일을 보다 바람직한 것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여가가 너무나 보람차고 즐겁다면, 사람들은 일터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p.279)

- “대중여가혹은 오락의 질은 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근로자들이 일의 세계와 여가의 세계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중오락은 일로 복귀하는 것을 참을 수 없는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서, 일로부터의 구원을 제공한다.(p.282)

- 사람들은 나뭇조각으로 카누를 만들거나 가족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한가한 시간을 원하지만, 단지 TV를 더 많이 보기 위해 여가시간을 원하지는 않는다(비록 한가한 시간에 그들이 실제로 하는 일은 TV를 보는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다).(p.282)

일부 사람들은 너무 피곤하거나 너무 바빠서 그러한 여가를 즐기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은 일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오락을 원한다. TV시청과 같은 오락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이 우리의 힘과 자원을 몽땅 소진시켜서 TV시청 외에는 하고 싶은 것이 없도록 만들거나, TV시청을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활동으로 만든다면 잘못된 것이다.(p.283)

- 흥미로운 일을 하는 사람들은 흥미로운 여가를 추구하고, 지루한 일을 하는 사람들은 수동적인 여가에 만족하곤 한다.(p.284)

- 살아가면서 일과 여가를 분리시키는 데는 특정한 재능이 필요하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생계를 꾸리는 데 요구되는 육체적, 정신적 긴장에 압도된 나머지 여가활동에 참여하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삶과 일을 분리하는 것이 그 둘을 통합하는 것보다 더 유익할 것이다.(p.286)

- 1970, 경제학자 스테판 린다는 <곤경에 처한 유한계급>을 발간했다. 이 책에서 그는 부유한 사회에 사는 사람들이 더 많은 자유시간더 많은 소비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 대부분 더 많은 소비를 선택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러한 이유로 인해 소득의 증대가 반드시 행복의 증대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p.286)

- H.W. 마쉬의 1991년 연구에서는 십대들이 대학에 갈 돈을 저축하기 위해 일하는 경우 지루한 일을 할 때조차도 성적이 향상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반면 십대들이 자동차나 CD플레이어 같은 사치품을 사기 위해 일을 하는 경우에는 일의 종류에 상관없이 성적이 떨어졌다.(p.288)

- 때로, 우리가 일을 하는 이유는 우리가 실제로 하는 보다 더 중요하다. 가족을 부양하거나 대학에 가기 위해 경험하는 일이 옷이나 CD플레이어를 사기 위해 하는 일보다 더 만족스러운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목적 자체가 더 영구적이고 의미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젊은이들에게 원하는 것을 주기보다는 그들이 그것을 스스로 벌어서 사도록 하는 편이 더 낫다고 주장한다.(p.289)

- 만약 그들이 물건을 사기 위한 돈을 벌기 위해 자유시간을 포기한다면, 그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여가를 가질 수 없다. 그들은 어떤 활동들이 자신에게 본질적으로 좋은지 발견할 시간을 갖지 못한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며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은(부모를 비롯하여 다른 권위 있는 사람들이 그러는 것처럼) 두려워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중요한 일이다. 말썽을 일으킬 위험이 있을지는 몰라도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시장이 만들어내는 방식이 아닌, 자기 방식대로 인생을 즐기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p.289)

- 프레드 히르슈는 <성장의 사회적 한계>라는 저서에서 사람들이 상픔과 서비스로부터 얻는 만족은 그들 자신의 소비가 아니라 타인들의 소비에 의해 결정된다고 썼다. 이웃사람들에게 지지 않으려고 허세를 부리다 보면욕망은 무한해진다.(중략) 과거에 우리가 이웃사람들에게 지지 않으려고 허세를 부렸을 때에는 비슷한 소득을 가진 사람들과 경쟁했다. 그러나 우리가 직장이나 뉴스에서 본 사람들에게 지지 않으려고 하는 요즘, 우리는 우리보다 몇 배나 많은 돈을 버는 사람들과 경쟁하려고 노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우리를 막힘 없는 소비와 부채, 더 긴 노동시간의 순환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줄리엣 쇼어는 <과소비하는 미국인>에서 이 순환의 고리 속에 빨려들어간 사람들은 소비가 삶의 의미와 만족을 줄 것이라고 점점 기대하게 된다고 이야기한다.(중략) 우리는 원하는 물건을 사기 위해 더 많이 일하고,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힘든 일을 보상받기 위해 물건을 구매하며 자유시간을 사용하게 된다.(p.290~291)

- 돈은 당신이 돈을 번 방법을 포함하여 많은 것을 숨겨준다. 우리는 국세청에 시달리는 시민이자, 자녀들에게는 무시당하는 부모이며, 인정받지 못하는 배우자이자 무기력한 근로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고객으로서 권력을 가지고 있다. 시장에서는 현금이나 수표, 혹은 신용카드를 갖고 있기만 하면, 당신이 누구든 상관하지 않는다.(p.292)

- 우리가 실제로 일터에서의 자유를 시장에서의 자유와 교환했다면 통제권을 되찾는 한 가지 방법은 시장에서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다. 우리의 수입 이하로 생활하는 것은 수입을 초과하여 생활하는 것만큼 즐겁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일을 할 것인지를 결정할 때 더 많은 융통성을 허락한다. 부채와 소비 욕구로 인해 우리는 싫어하는 일에 얽매여 우리가 좋아하는 다른 일을 하는데 쓸 수 있는 시간을 빼앗길 수 있다.(p.293)

여가의 가장 결정적인 특징은 본질적으로 유익하다는 것이다.(중략) 의미 있는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일과 여가 간의 질적인 차이가 거의 없다.(p.293)

- 빅터 E. 프랭클은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을 중심으로 치료방법을 개발했다. ‘의미치료(logotherapy)'는 의미를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근본 원동력이라는 가정에 기반하고 있다.(중략) 프랭클은 삶의 의미는 변화하는 것이고 사람마다 다른 것이지만, 사람들은 선행을 하고, 가치를 경험하고, 마지막으로 고난을 통해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중략) 정서적 문제가 아니라 철학적 문제를 해결하려고 고심하는 사람들에게 치료나 대중심리학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중략) 삶의 의미에 관해 질문할 때 대중적인 책들에 의지하는 사람들은 누군가 그들을 격려해주고 해답을 주기를 원한다. 치료에 의지하는 사람들은 가치가 개입된 대화가 아닌,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를 원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종교에 의지하여 이 질문을 해결하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p.301~303)

- 신앙은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주는 동시에, 그 질문을 제거해 버린다. 모든 사람의 삶은 불멸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우리 모두는 그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하는 참가자들이다. 사람들의 삶이 억압적이고 혼란스러워질 때, 그리고 그들의 문제에 대해 세속적인 해답이 없는 것처럼 보일 때, 신앙은 희망과 위로를 제공한다.(p.304)

삶의 의미라는 문제는 우리가 가치 있는 삶을 살았는지에 대한 판단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삶에서 행동하는 방식에 관한 문제인 듯 하다.(중략) 이런 측면에서, 의미는 개인의 인식이다.(p.306)

- 의미 있는 삶이란 현재를 위한 삶과 미래를 위한 삶이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러셀을 비롯한 수많은 철학자들은 삶의 의미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한 질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러셀은 삶의 가장 어려운 부분은 오늘을 위해 사는 것이라고 주장한다.(p.307)

- 개인들은 자신의 직업에서 특정 기능을 담당하고 있지만, 그들의 삶이 칼이나 기계와 같은 기능을 하는 것은 아니다. 몇몇 사람들은 이렇게 얘기할 것이다. “내 삶의 목적은 암 치료법을 발견하는 겁니다”, “세상에서 배고픔을 몰아내는 것입니다여기에서 우리는 그들이 일하는 목적이 그들의 삶의 목적이 된다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다. 웨이트리스는 자신의 삶의 목적이 그녀가 일하는 목적과 같다고 여기지 않을 것이다.(p.308)

-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행복에 대한 보편적인 요구와 우리 문화에 널리 퍼져있는 불행은 일을 지향하는 문화의 산물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우리는 오직 일을 통해서만 행복을 얻는다. 그것은 극도의 피로와 회복이 반복되는 과정이다.(p.311)

-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행복한 시간의 역동성을 이해하면 행복한 삶을 사는 방법을 더 잘 터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중략) 이러한 절정 경험(몰입)이 집중을 요하고 명백한 목적을 가지며 즉각적인 피드백을 제공하고, 삶의 문제들을 잃어버릴 정도로 깊이 파고들어야 하는 유한한 일을 할 때 발생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러한 과업은 또한 일하는 사람이 통제력을 갖지 못하는 것에 대해 걱정하지 않을 정도로 완전한 통제력을 발휘하도록 한다.(중략) 칙센트미하이는 사람들이 일하는 시간 동안에는 약 절반의 시간 동안 몰입을 경험하고, 여가시간에는 18% 정도만 몰입을 경험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p.311)

- 사람들은 일하는 동안 더 높은 수준의 질적인 경험을 하고 있다고 보고하면서도 일하고 싶어하지 않으며, 여가시간에는 낮은 수준의 질적 경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가를 선호한 것이다(p.312)

why? 첫째, 일의 특성상 자발적인 참여의 결여라는 부분이 주는 선입견 때문이고, 둘째, 일 자체가 여가보다는 집중력을 수반할 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이 제공하기 때문이다(사람들은 여가에 그다지 집중하며 보내지 않는 경우가 많다)

- 우리는 행복을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혹은 가장 적당한 장소가 일터라고 결론 내리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칙센트미하이의 연구로부터 얻을 수 있는 진정한 통찰은, 현재 우리의 문화에서 사람들은 일터가 아닌 곳에서 이러한 행복한 순간을 제공하는 활동에 참여하는 능력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많은 이들의 삶은 일에서 오는 피로와 다시 일을 하기 위한 회복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의 삶은 다나이드의 새는 물항아리와 같다. 그들은 조금씩 행복을 채워넣지만, 항아리는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행복은 삶 전체이지 일련의 지나가는 사건들이 아니라고 강조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p.313)

- '과학적 관리법(근로자들의) 육체를 손에 넣으려고 시도했고, 다음으로 출현한 인간관계론은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했으며, 이제 몇몇 컨설턴트들은 영혼을 건드리려 하고 있다.(중략) 그것은 사람들을 기분 좋게 만듦으로써, 애초에 사람들을 기분 나쁘게 만들었던 권력과 갈등, 자율성에 관한 심각한 문제들을 처리하는 대신 그것에 적응하도록 하는 것이다.(p.317~318)

- 그러나 고용주들이 유일한 비난의 대상은 아니다. 많은 고용인들이 실제로 게을러졌고, 그들은 고용주들이 자기 삶의 많은 부분들을 책임지도록 기꺼이 내버려두었다.(p.319)

- 의미 있는 일은 우리 스스로 발견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정의할 수 없을지 몰라도, 그것을 보면 알게 된다. 종교직과 같은 일부 직업들은 본질적으로 의미를 갖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한 직업들조차도 거기에 종사하는 사람이 의미를 발견할 때에만 의미를 지닌다. 의미있는 일이 항상 편안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때로 고통이나 고된 일 혹은 스트레스를 수반한다. 의미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도 여전히 좌절하거나 지쳐서 집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의미 있는 일을 한다는 것은 대체로 개인의 삶에 활기를 북돋워준다. 그것이 의미 있는 일의 가장 구별되는 특징일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경험과 우리가 논의한 숭고한 여가의 개념은 거의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종류의 활동들은 행복한 삶의 중요한 부분이며, 일터에서 이러한 활동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여가를 통해 그것을 즐길 것이다.(p.322~323)

- 모든 사람이 의미 있는 일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단지 존중받기를 원하며, 어느 정도의 생활수준을 유지하고 싶어 할 뿐이다.(p.323)

- 많은 근로자들은 고용주들에게 헌신하는 것에 대해 재고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고용주들이 먼저 그들의 헌신을 철회했기 때문이다.(중략) 임종할 때 사무실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것을 후회할 사람은 거의 없다.(p.326)

- 기업의 입장에서, 정직한 직장이 되기 위한 첫 단계는 심리적 조작이나 공허한 선전에 해당하는 경영지침들을 포기하는 것이다. 어떤 것도 더는 효과적이지 않다.(p.327)

- 많은 사람들은 오랜 근무시간뿐 아니라 채무에 시달리고 있으며, 스트레스와 외로움, 그리고 가정해체로 인해 고통받고 있다. 왜 그런가? 한편으로 그것은 우리가 항상 더 많은 것을 원하기 때문이며, 또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선택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중략) 우리가 흥미로워할 일이나 훌륭한 일을 소비, 여가, 안정 가운데 하나와 기꺼이 교환하려 한다면 우리는 통제권을 되찾고 아마도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거래에서 우리는 소비 욕구를 억누르는 일이 가장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우리를 가장 자유롭게 할 것이다.(p.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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