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라는 사막을 즐겁게 건너는 법
스티브 도나휴의 ‘사막을 지나는 여섯 가지 방법’이란 책이 있습니다. 인생은 정상을 향해 마구 올라가는 그런 길이 아니라 오히려 끝도 없는 사막을 자신만의 나침반을 가지고 횡단하는 것과 같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저 역시 인생이 사막이라는 말에 꽤 공감을 하는 편입니다.
가끔 인생이 사막과 같다고 느껴본 적이 없으신가요?
끝도 없고, 낮은 열기에 가득 차 숨이 막힐 듯하고 밤은 추위에 얼어붙는 기분이 듭니다...
온갖 신기루가 난무하고 그 속에 숨은 작은 오아시스에서 간신히 숨을 돌릴만한 기쁨을 느끼며, 수많은 이야기의 사람들이 교차하는 저마다의 사막...
인생은 고해(苦海)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그런 관점에서도 가장 어울리는 삶의 비유가 사막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언젠가부터 그런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이 사막과도 같은 인생을 즐겁게 건너려면, 무엇이 있어야 할까?’
몇 가지 생각이 떠올라 정리를 해봤습니다.
첫 번째는 ‘준비된 나’일 겁니다.
여기서의 준비는 특별한 것이라기보다는 어렵다면 어렵고 쉽다면 쉬운 두 가지입니다.
바로 ‘체력’과 ‘방향’입니다.
아주 먼 길을 가야하고, 눈으로 돌아보면 무엇 하나 이해하기 쉬운 지표도 보이지 않습니다. 때로 삶은 아주 쉽게 길을 잃게 만듭니다. 준비되지 않은 사람들은 곧잘 쉽게 지치기도 하지요. 인생같이 긴 여행에는 언제라도 자신의 힘으로 딛고 일어설 체력이 필요합니다.
어린 시절엔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다고 믿었지만, 이제는 대부분의 경우 ‘육체가 받쳐주지 않는 정신은 금방 피폐해 진다’는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스스로를 돌아보고 꾸준히 챙겨두지 않으면 시간이 지날수록 그 차이는 벌어집니다. 자기 한 몸 지탱하지 못하는 자에게 사막이란 남에게 민폐를 끼치는 장소가 되기 십상입니다.
'방향'은 일종의 나침반을 갖는 것입니다. 사막이란 곳에서 세세한 지도를 갖기는 어렵겠지요. 인생이라는 사막은 각자에게 다른 모양이라서 일관된 지도라는 것이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다른 이의 지도만 믿고 가다간 곧잘 신기루에 홀려 더 혼란스런 여정을 가야 할지도 모릅니다.
인생의 나침반이 오묘한 점은 스스로만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의 삶에 게으르거나 무심했던 이들은 흔히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그냥 즐기면서 여행하면 되지 않느냐구요? 그러기엔 사막은 너무 광활하고 다양합니다. 그때그때 자기가 즐겁다고 판단한 방향이 막상 전혀 원치 않았던 행로가 되어 사람을 괴롭히는 경우는 어렵지 않게 발견됩니다. 낭만이나 순간순간의 감에 따른 결정만 믿기엔 사막이란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습니다. 사막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 끝 간 데 없고 확신조차 없는 삶을 믿고 가려면 우리만의 방향타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두 번째 필요한 것은 ‘함께 갈 동반자’입니다.
인생의 동반자는 배우자를 포함한 가족, 혹은 친구 같은 이들로 대표될 겁니다. 그 막막한 곳을 혼자 고립된 채 여행하는 것은 무서운 일입니다. 힘이 빠질 때 서로 위로해 줄 수 있고, 따뜻한 시선을 넘어 때로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존재는 단연코 ‘사람’입니다.
삶을 살면서 만나는 이들 중에서 함께 사막을 여행할 동반자를 찾으라면 우리는 어떤 사람을 선택할까요? 함께 사막을 넘고 싶은 사람들이 많다면 그 자체로 삶은 풍부해 질 것입니다.
혼자보다는 둘이, 둘 보다는 여럿이 무리를 이뤄 사막을 건널 수 있다면 그만큼 삶은 덜 불안하고 풍요로워지며, 때때로 기쁨을 주는 곳도 될 겁니다.
오히려 걸림돌이 되지 않겠느냐구요? 때로 동반자를 잘못 선택할 수도 있겠지요. 최선을 다해 사람을 선택하되 잘못 골랐다 한들 너무 야박하지 않게 구는 것도 삶의 한 지혜겠지요.
생각해보면 '우리도 누군가의 잘못된 선택일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것에서 관계의 여유가 생기지 않을까요?
세 번째는 훌륭한 낙타를 고르는 것입니다.
여기서 낙타는 ‘일’입니다. 그 자체로 나와 맞는 낙타라야 하겠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낙타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보살핌’이 필요합니다. 내가 애정을 갖고 보살피고 키우면 그 낙타는 내 삶의 짐들을 대부분 대신 지며 함께 흔쾌히 사막을 건너갈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내가 무심하게 ‘낙타’를 대하고, 돌보지 않는다면 그 낙타는 한밤중에 도망가거나 지쳐 쓰러져 버릴 지도 모릅니다. 사막에서 나를 도와줄 낙타가 없다면 무슨 수로 그 먼 여정을 횡단할 수 있을까요?
한 가지 더 언급해야 할 것이 있네요. 요즘은 한 마리의 낙타를 골랐다고 그 녀석만 죽자고 타고 사막을 건너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때로 몇 마리를 함께 몰고 갈 수도 있고, 상황이 바뀌면 준비된 다른 낙타로 갈아 탈 수도 있습니다. 낙타를 잘 다룰 수 있다면 그 여행은 훨씬 쉽고 여유 있어 질 것입니다.
마지막 한 가지는 ‘오아시스’를 많이 만나는 것입니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나는 것은 운도 좋아야 하겠지만, 인생이라는 사막에서 만나는 오아시스의 특징은 곳곳에 아주 작은 오아시스가 많다는 것일 겁니다. 그러다보니 누군가는 무심코 지나가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곳에서 다음 길을 갈 작은 에너지를 얻기도 합니다.
혹자는 아주 큰 오아시스만이 제대로 된 기쁨을 줄 수 있다고 믿습니다. 과연 그럴 까요?
적지 않은 나이를 살고 있지만 ‘큰 오아시스’는 기준조차 애매한지라, 살면서 ‘이거였어!’라는 느낌을 줄 수 있는 것만 기다린다면 우리 삶은 무리한 기대로 불행해지기 쉬울 겁니다.
갈증을 풀어주고 잠시나마 호흡을 돌릴 수 있게 해주는 작은 오아시스의 존재야말로 사막을 잘 건너기 위한 숨겨진 지혜의 핵심이 아닐까요?
자칫 커다란 오아시스의 허상만 쫓다보면 신기루에 빠져 그나마 가진 에너지를 다 빼앗겨야 할지도 모릅니다.
이상이 제가 생각한 사막을 즐겁게 건널 수 있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을 빠뜨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건 우리가 지나는 길이 비단이나 향락으로 어우러진 길이 아님을 인정하고 출발하는 것입니다.
삶이 즐겁기만 하면 좋겠지만 어느 정도 살다보니 그건 ‘마약에 취한 사람’에게나 가능한 일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삶은 어떠해야 한다’는 기대치가 낮아질 때 오히려 행복의 가능성은 높아지는 역설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마치 매일 고급 뷔페만을 먹는 사람이 소박한 음식을 먹는 사람보다 기대 이상의 맛있는 음식을 만날 기회가 좁아지게 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우리가 건너는 각자의 사막에는 또 다른 삶의 법칙들이 존재하겠지요. 여러분의 방법은 또 어떤가요? 댓글로 남겨주시면 제게도 좋은 지침이 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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